누군가 댓글을 남겼다. 나는 그 댓글을 읽고 바로 불편해졌다. 이 말은 나를 평가하는 것 같고, 그 평가는 부당하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잠깐 멈추면 다른 가능성도 보인다. 상대는 나를 공격하려던 것이 아니라, 내가 놓친 맥락을 말했을 수도 있다. 이 말은 나를 공격하려던 것이 아니라, 내가 놓친 맥락을 말했을 수도 있다. 내가 정상적인 평가를 부당한 평가로 읽었을 가능성이다.
나는 이런 일을 생각할 때 A라는 기질을 가진 사람과 A'라는 외부의 평가를 떠올린다. A라는 기질을 가진 사람은 외부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예전에 부당한 평가를 자주 겪었다면, 다음 평가에서도 먼저 경계하는 관성이 생길 수 있다. 그 관성이 나를 지켜준 적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관성이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반응을 돌아보며 붙인 설명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가리는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의 평가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책임을 따지는 질문만으로는 다음 행동을 정하기 어렵다. 적어도 내가 오해했을 가능성까지 포함해 판단하는 책임은 내게 있다.
그래서 피드백하기 전에 두 가지를 묻는다.
첫째, 이 말은 실제로 나를 부당하게 깎아내린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상처의 맥락을 덧씌워 읽은 것인가.
둘째, 상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한 번 더 물어볼 수 있는가. 내가 확인 질문을 던졌을 때 대화가 열릴 사람인가, 아니면 공개된 자리에서 즉시 맞서야 하는 상황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공개적으로 반응하면, 나는 내 해석을 사실처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SNS에서 연결된 모든 사람에게 피드백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런 말을 해도 서로의 맥락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말한다. 공개적인 자리보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먼저 묻는다. “제가 이 말을 부당한 평가로 읽었는데, 의도하신 뜻이 맞나요?”라고.
그래도 일이 커진다면 그때 내 의견을 밝힐 수 있다. 처음부터 모든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류하는 것도 하나의 판단이고, 말할 장소를 고르는 것도 대화의 일부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이 흐름 전체를 누군가의 잘못을 판정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다. 내가 과민했을 수 있고, 상대가 서툴렀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정과 해석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는 있다.
결국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사건을 오해하고 있을 때, 용감하게 내 의견을 말해 줄 사람들과 얼마나 관계하고 있을까. 나를 무조건 편들어 주는 사람보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맥락을 개인적으로 알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부디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콘텐츠 생산자만 대화의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콘텐츠를 읽고 반응하는 소비자도 자신의 관성을 살펴야 한다. 내가 먼저 부당하다고 느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상대의 의도까지 확정할 수는 없다.
다음에 비슷한 댓글을 만나면 한 번만 더 묻고 싶다. 지금 나는 사실을 읽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지키려는 오래된 관성을 읽고 있는가.